88만원 세대

 

나는 선진국이 별게 없다고 생각한다.

그냥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지랄맞다고 느껴질 때, 확 때리칠 수 있는 정도만 되면 될 것 같다.

다시 제 정신 돌아올 몇달 동안은 푹 쉬고 나서 도로 아무일 없었다는 듯 컴백할 수 있는 사회 말이다.

 

그런데 이 대한민국이라는 땅덩어리는,

한발짝만 밖으로 내밀었다가는 그대로 인생 종치는 거다.

괜히 밖으로 고개 돌려봤자 헉 하고 가쁜 숨 몰아쉬곤 쥐죽은 듯 견뎌야 하는 거다.

행여 나의 '불손한 마음' 눈치챌까 전전긍긍하며, 잘 보이지도 않는 썩은 낚시줄 잡고 두눈 질끈 감는거다.

 

지들도 딱히 든든한 낚시대를 가진 건 아니지만,

그래도 이왕 들고 있는 낚시대, 최선을 다해 뒤흔들어댄다.

'아 저 여기서 떨어지면 편의점 알바해야 하거든요.'

인권이나 개성 따위 표준전과에 묻어놓고 손에 피가 배어나도록 낚시줄을 가로채 내 목에 동여맨다.

'이봐요. 제 목숨도 걸게요. 부디 소중히 다뤄주소서. 아니, 다뤄주기라도 하소서.'

 

죽도록 얄밉고 화가나지만, 그럴 새도 없다.

그보다 더 짜증나는 건, 여기 이 위태위태한 내 자리라도 어떻게 안될까 흘끔대고 있는 또 다른 20대다.

토익토플 일본어 중국어 점수 이마에 떡하니 붙이고 한살이라도 어린 쌩쌩한 체력 들이대는,

또 다른 20대.

저들만 없으면 내 말발이 조금이라도 더 먹힐텐데.

'너 말고 하겠다는 인간들, 줄 섰거든?' 한마디면 그 자리에 얼어붙어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.

 

앤드슨은 빨간 알약을 먹고 네오가 된다.

여기 '후진국'에선 파란 알약 값이 천정부지일 게다.

진실이고 뭐고 필요없다. 따땃한 월급봉투면, 정체모를 위화감 따위가 뭐 그리 대수겠어.

 

이 나이에 분명 철이 덜 든건 맞지만,

정말이지 난 방황을 하고 싶다.

그냥 다 모른 척하고 미친 척 이 시스템에서 잠깐 빠져나오고 싶다.

그런데, 몇달 후 되돌아 올 수 있을까?

내 나머지 인생을 모두 미친 척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.

 

도무지, 삼시세끼 먹기도 빡세서 방황할 틈도 없구나.

by esprit | 2008/03/16 10:45 | | 트랙백 | 덧글(0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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